오피스텔의 문이 열리자마자 석진이 여주의 입을 맞췄다. 몽롱해진 여주가 구석으로 떠밀렸다. 예민한 센서등은 미세한 움직임에도 반응해 꺼졌다 커지길 반복했다. 위태롭게 벽을 짚은 여주의 손이 떨렸다. 입을 맞추는 내내 여주는 버거워했다. 알알하게 남은 술기운엔 그렇게 보내버린 태형이 여전히 남아 괴롭혔다.
어깨가 밀쳐진 석진이 입술을 떼고 눈꺼풀을 올렸다. 여주가 석진의 어깨를 짚은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채 가시지 않은 열기가 두 사람의 호흡과 함께 산란했다. 둘만의 공간이 다급했던 석진은 다시금 다가와 턱을 감쌌다. 여주가 재차 피하고 석진의 눈매가 초조해졌다.
"힘들어?"
"피곤해요."
"한 번만 더 안 될까?"
"졸려요. 다음에요."
"……."
"……."
"……그래."
미련이 남은 석진이 여주의 턱선을 만지작댔다. 졸음을 이기지 못한 여주가 먼저 어깨로 쓰러졌다. 과음했겠지. 하는 수 없이 안아 침대로 데려가면서도 여주는 석진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아무래도 달아오르는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석진의 노력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명의의 오피스텔은 학교에서 밤을 새는 일이 잦을 때 잠시 사용하던 도처의 거주지였다. 여주를 집에 들인 이후로는 거의 들리지 않아 사람의 때가 묻지 않았다. 졸린 눈으로 이불을 끌어올리는 여주의 냄새가 침구 곳곳이 묻었다. 앞으로 이 공간 안에 아이의 향이 잔뜩 베이겠지.
매트리스 가장자리에 앉아 머리칼을 만져주면 여주가 그 손으로 몸을 팠다. 마음이 매캐했다. 정 회장이 증권가에 찌라시를 흘린 것 같다고 했다. 당장 주가에 영향을 미치겠지. 임원들은 해명을 요구할 것이었다. 그저 사랑이 무어라고. 우리도 정의하지 못해 매일 서로에게 묻고 답하는 그 사랑이 대체.
졸음기 묻은 여주의 숨소리가 골라졌다. 석진도 함께 끓는 체온을 삭혔다. 간신히 진정시킨 마음으로 아이를 바라봤다. 하얀 침구에서 눈을 감은 아이의 호흡이 명징했다. 그 숨에는 여전한 갈증이, 석진을 끝없이 태우는 기근이 있었다. 저려오는 검지로 매트리스를 두드렸다. 다시금 담배가 당기는 입술을 축였다. 고루한 것, 추상적인 것, 소란스럽지 않은 것. 여주는 석진이 손에 쥐고 싶던 모든 것이었다.
뒤척이던 여주가 외투를 벗었다. 다시 술 버릇이 도진 모양이었다. 얇은 옷 사이로 드러난 목덜미가 매끈했다. 석진은 그 하얀 것을 그저 지켜만 보았다. 이렇듯 제 앞에서 쉽게 경계를 허무는 여주를 어떻게 다뤄야 할까. 만지고 싶었다. 목소리를 듣고, 그것에 입을 맞춘 채 형형한 눈을 마주하고 싶기도 했다. 여주가 입고 있던 마지막 옷까지 벗으려고 할 때 석진이 에어컨 리모컨을 들며 여주의 손을 잡았다. 저지당한 여주가 눈꺼풀을 들었다.
"……."
"옷 입어. 더우면 온도 낮출게."
"아…… 네."
석진이 에어컨 온도를 조정했다. 약풍의 바람이 여주의 앞머리를 흩날렸다. 매무새를 가다듬은 여주가 느릿하게 눈을 끔뻑였다. 아직 꿈과 기억의 어드메였다.
"술 많이 마셨네."
"조금요."
"그래.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다. 쉬어."
"근데 여기 어디예요?"
"오피스텔이야. 학교랑도 가까워서 앞으로 다니기 편할 거야."
"네?"
"이제 여기 있어."
무감한 표정의 석진을 바라보던 여주가 헤드로 몸을 일으켰다. 잠기운이 달아난 눈이 또렷해졌다. 잠시 구겨졌다 펴지는 여주의 미간을 동요 없이 지켜봤다. 이 아이가 아무리 사랑스럽다 한들, 석진은 여전히 여주에게 화가 난 상태였다.
"아까처럼 또 나 없을 때 다른 친구들 만나고 그러지 말고 앞으로 여기 있어."
"……왜요?"
"네가 내 손에 닿는 곳에 있었으면 좋겠어. 널 위험 속에 버려두고 싶지 않아."
"……."
"그 친구들이랑은 이제 연락하지 말자."
"……."
"그렇게 해줄 거지?"
오피스텔의 공기가 새벽에 젖었다. 여주의 신변을 보호하고자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다. 미행하는 사람까지 붙인 정 회장이 앞으로 어떤 영역 안에서 여주를 해하려 들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다 한들 전부 핑계였다. 인내심이 한계점에 오른 석진은 이제 여주를 제 손만 닿는 공간에 두고 싶었다. 정 회장이든, 정국이든, 호석이든.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오롯한 공간에 가두고 홀로 여주를 살피고 싶었다.
바람과 달리 여주는 쉽게 답을 주지 못했다. 석진의 태도가 어려웠다. 태형을 등지고 돌아선 순간부터 여주는 무척이나 불안했다. 이런 나를 그냥 쓰다듬어주시면 안 될까요. 하지만 선택권은 없었다. 그 사실이 오늘로 자명하게 와닿았다. 그가 하라면 그런대로. 바라보는 그가 너무 황홀해서 다른 말은 할 수 없었다.
"……집에 지민이는요?"
"빠르면 내일도 기숙사 들어갈 수 있을 거야."
"……."
"걱정하지 마. 내가 탈 없이 처리할게."
"……."
"……."
"……네."
"……."
"알았어요."
"그래. 역시 착하다."
석진이 여주를 쓰다듬으며 칭찬했다. 대번에 안겨버리는 여주를 품으로 넣었다. 덜어진 석진의 숨이 길어졌다. 손목의 시계는 새벽의 정 가운데였다. 가야겠구나. 아이의 입을 한 번 더 맞춰볼까 고민했다. 고민하다 상태가 나빠 보여 도로 침대로 눕히는 것이 석진의 사랑이었다. 이불을 정리한 석진이 어질러졌던 것을 정리하며 외투를 챙겼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이 자리에 더 있었다간 피로해하는 여주를 더는 배려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술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일단 자요. 내일 올게."
"……."
"약 챙겨놨으니까 깨서 속 불편하면 바로 먹고."
잘 자. 인사를 건네곤 현관으로 걸었다. 하지만 문을 열기 직전 여주에게 걸음을 저지당했다. 뒤를 끌어안은 여주가 석진의 등에 볼을 부볐다. 그 행동이 너무도 사랑스러워 석진의 머리가 탁해졌다.
"가지 마요."
"……."
"안 갔으면 좋겠어요."
허리의 팔을 푼 뒤 몸을 돌려 눈을 마주했다. 새벽빛 아래 여주의 두 볼이 술기운에 발그레했다. 잘 익어 부푼 뺨은 다시금 석진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어떻게 견딘 밤인데. 붉어지는 목덜미가 선명했다. 석진이 검지로 뺨을 건드리자 여주가 몸을 움츠렸다.
"취했구나."
"……."
"귀엽네."
"가지 마요."
"나도 옆에 있고 싶어."
"그럼 5분만 있어요."
"……."
"5분은 괜찮잖아요."
"알았어."
마음 겉면까지 이 아이가 덕지덕지 묻었다. 욕심은 나날이 심해졌다. 더 깊은 곳, 더 은밀한 곳. 석진은 여주의 그곳에 닻을 내려 영원히 정박하고 싶었다.
취기에 젖고 사랑에 젖은 둘의 눈이 느슨해졌다. 곧 졸음이 밀려들겠지. 참기 어려운 무게가 여주의 눈꺼풀을 덮쳤다. 그전에, 꿈에 적셔지지 않은 지금 순간에. 목을 감으면 석진이 여주의 골반을 안아 밀착했다. 걸음대로 물려나는 여주의 발이 느지막했다.
"취하면 원래 이래?"
"뭐가요?"
"귀여워."
"나 술 안 마셔서 몰라요."
"앞으로 나랑만 마셔요."
"응. 나도 교수님이랑 둘이 마셔보고 싶다."
"나한테 질 텐데."
"지지 뭐."
"지는 거 싫어하잖아."
"교수님은 괜찮아요."
"……."
"나 그냥 계속 질래요."
조명의 사각지대에서 밀려나는 등이 벽면과 접착했다. 석진이 곧장 들어 선반 위로 앉혔다. 나란해진 눈동자는 서로를 녹였다. 그런 당신을 어찌 만져주지 않고 견딜 수 있을까요. 촉촉한 시선이 내밀하게 서로를 갈구했다. 그건 새벽을 감추기에 충분했다. 그림자 아래에서, 달빛 아래에서 두 사람은 자발적으로 길을 잃었다.
"교수님 잘 생겼어요."
"응?"
"엄청 잘생겼다. 본인도 알죠."
"알아."
"얼굴 많이 보고 싶어요."
"봐. 보고 싶을 때마다 보여줄게."
"부르면 달려와 줄 거예요?"
"너라면 어디든."
그러고도 한참 서로의 눈을 마주한 이유는 간단했다. 입술이 아닌 눈으로 나누고픈 이야기도 있었으니까. 서로에게 침식당한 마음 한가운데는 오직 사랑 하나만이 선명했다.
어디까지 포기할 수 있겠느냐던 물음이 석진을 스쳤다. 내가 너를 위해, 너를 지키기 위해. 느슨한 눈으로 여주의 얼굴을 뜯어보고 있으면 순간이 믿기지 않았다. 나를 이토록 나약하게 만드는 이 아이는 대체 어느 순간부터 내 안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던가. 슬며시 볼을 감쌌다. 석진의 손등이 사나워졌다. 연분홍색이 촉감으로 느껴지면 그의 음영진 울대가 들썩였다.
"……여주야."
"……네."
"나 사랑하지."
말해줘. 네 목소리로 듣고 싶어. 석진의 모든 것을 놓치고 싶지 않은 여주의 눈동자가 다급히 주변을 배회했다. 떨리는 말꼬리, 달아오르는 귀, 촉촉해지는 입술과 야릇한 눈매. 그가 오로지 나만을 위해 만들어주는 것들. 여주가 석진의 손등 위로 제 것을 포갰다.
"…응."
"……."
"사랑해요."
"……."
"사랑해요. 교수님."
대답을 들은 석진이 망설임 없이 입을 맞췄다. 순식간에 밀착되는 몸이 거칠었다. 그의 손은 여주의 팔과 다리 곳곳을 헤집고, 그림자에 가려진 두 사람은 비교할 수 없는 농도로 서로의 혀를 감각했다. 여주의 옷가지가 느슨해지고 석진의 머릿결이 헝클어졌다. 방은 빠르고도 공격적으로 어둠에 함락됐다. 그리고 석진은 결심했다. 어디까지 포기하겠냐 묻는다면 전부라 답하겠다고. 너를 제외한 모든 것이라, 나 그렇게 답하겠다고. 여주의 티셔츠 속으로 들어가는 석진의 손이 다급했다. 손톱만 한 새벽달이 텅 빈 방 위로 반짝였다.
* * *
K그룹 외동아들, 제자와의 불건전한 스캔들?!
찌라시는 석진의 이야기를 싣고 퍼졌다. 역시나 정 회장은 사진을 빌미로 바이오 계약건을 포기하라는 무언의 압박을 가했다. 학계까지 도달한 소문은 걷잡을 수 없어졌다. 특히나 보수적인 자들이 많은 미학계였다. 평소에도 재벌 아들의 고고함을 고깝게 보던 이들은 학자라는 사람이 어떻게 학생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느냐고 그의 도덕성을 질타했다. 소문은 댐을 방류하듯 주변으로 넘쳐흘렀다.
스캔들은 사람들의 입술로 간편히 건너뛰는 가십거리가 되었다. 석진보다 베일에 가려진 상대에 집중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무슨 과래? 누구래? 물망에 오른 대상에는 당연스레 여주도 있었다. 석진은 그에 대해 어떤 말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의 관심에서 여주를 멀리 떨어트리고 싶었다. 그렇기 위해 책임져야 했다. 그 아이와 아버지의 회사, 그 모두를 지키기 위해 석진은 교수직을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내가 택한 유일한 것, 모든 것을 버려도 놓을 수 없는 한 가지. 석진의 소유욕은 점차 여주에게로 심화됐다. 회사로 지분을 옮기기 위한 업무에 매달리느라 바쁜 와중에도 수시로 여주의 위치를 보고받았다. 그런 그를 너무 사랑해버린 여주는, 석진의 바람을 전부 따를 수 밖에 없었다. 태형은 물론 정국과도 더 이상의 연락을 끊고, 석진이 말하는 어느 위치든 그곳에서 그를 기다렸다. 단절된 새장 속에 갇힌 새처럼.
이런 구속조차 사랑이라 칭한다면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이토록 맹목적이고, 무자비하고,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것이 사랑이라면 우리 지금 사랑하고 있는 것이라고……
"안녕. 이 시간에 공대네."
사물함에 책을 챙기고 복도에서 태형을 마주쳤다. 같은 공대 내에서 부딪힘이 잦았던 두 사람이었다. 대개 태형의 주위에는 사람이 바글거렸고, 태형은 확실히 그것과 잘 어울렸다. 태형의 저곳은 여주의 이곳과 정확히 분리되어 있었다. 원래 그랬지. 너는 그곳에 있던 사람이었어. 내도록 엉뚱한 곳에 그 애를 붙잡았던 지난 시간이 헐겁게 느껴졌다.
실험실에서 나온 태형이 안경을 쓴 채 슬리퍼를 끌며 하품했다. 영락없는 공돌이의 모습이었다. 언젠가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달려와주던 아이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인사했다. 예상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무엇이 이토록 헛헛한지 알 수 없었다.
"응. 잠시 과사에 볼 일 있어서. 실험하다 왔어?"
"그렇지 뭐."
"아… 밥은 먹었어?"
"아직."
"나도 아직 못 먹었는데 밥이나 먹으러 갈까?"
"미안. 실험이 빡빡해서 시간이 없다."
"아… 그렇구나. 알았어. 바쁠 텐데 가."
"응. 맛있게 먹어."
태형이 돌아 실험실로 들어갔다. 그게 다였다. 이제 더는 남은 말이 없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칭할 단어는 이제 없었다.
현관을 연 여주가 석진의 오피스텔에서 석진이 사준 슬리퍼를 신고 석진이 사준 잠옷으로 갈아입고 석진이 사준 핸드폰을 든 채 노트북을 켰다. 모든 것이 석진의 소유물이었다.
여주가 스탠드를 켜고 책상에 앉았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지. 석진의 집을 나오면서부터는 취업 준비도 병행했다. 석진은 하지 말라 말렸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도 통장은 두둑했다. 석진은 앞으로도 그렇게 만들어 줄 것 같았다. 노트북으로 쓰던 레포트는 몇 번이나 쓰다 지우길 반복했다. 중간 대체 과제로 제출해야 했던 문사상 레포트였다. 여주는 집중이 되지 않았다. 어쩐지 불안했다. 하지만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레포트를 쓰던 여주가 잠시 책상에 엎어져 잠들었다. 눈을 떴을 땐 석진이 있었고, 시계는 새벽 1시였다. 쪼그려 앉은 석진이 여주의 머리를 만졌다.
"깼어?"
"으음…… 교수님 오셨어요?"
"응. 오늘 뭐 했어?"
"답답해서 잠시 산책 좀 했어요."
"일찍 들어와요. 걱정돼."
"알았어요."
"뭐 하고 있었어요?"
"교수님 강의 과제요."
"착하네. 이번엔 또 어떤 내용일지 기대된다."
석진이 여주의 앞머리를 쓸어주며 웃었다. 팔을 벌리는 여주를 익숙하게 안아 침대로 데려갔다. 여주는 베개로 제 머리를 눕혀주는 석진의 눈을 쉬지 않고 쫓았다.
"요즘 왜 이렇게 바빠요?"
"정리할 게 있어."
"어떤 거요?"
"회사 일이야. 신경 안 써도 돼."
"자주 와요. 보고 싶어요."
"그래. 금방 끝날 거야."
"……."
"다 끝나면 계속 같이 있자."
여주는 여주로 완전하고 깨끗해야 했다. 그런 소란스러운 것에서는 멀어져야 했다. 그래서 석진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피로가 묻은 석진이 여주의 다리 위로 엎드렸다. 아이의 보드라운 피부가 뜨거웠다. 여주가 뒤통수를 매만져주니 그제야 편히 내쉴 수 있는 숨이었다. 쉬지 않고 달려오는 외부의 것들은 석진을 지치게 만들었다.
"여주야."
"네."
"사랑해."
"……."
"너도 대답해 줘."
"……사랑해요."
"그래."
"……."
"좋다."
닿는 곳에 있어주는 여주가 황홀했다. 허벅지로 느껴지는 그의 호흡은 여주에게도 그를 간절하게 만들었다. 그런 석진이 너무도 아름다워 불안했다. 교수님. 저는 왜 부족한 걸까요. 이렇게 날 만져주고 사랑해 주는데도 저는 무엇이 그렇게 불안할까요. 석진이 무릎을 짚어 침대로 올라왔다. 곧이어 얽혀드는 숨은 어느 때보다 애절한 키스였다. 두 사람은 눈을 가린 채로 시간을 유예했다. 켜진 노트북에선 아직 문사상 레포트가 채 완성되지 않았다.
<신데렐라는 행복했을까요?>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았다. 하지만 착하고 성실한 신데렐라는 무도회에서 왕자를 만나 인생 역전에 성공한다. 왕자의 손을 잡고 궁전으로 들어간 신데렐라는 정말 오래오래 행복했을까.
중세 봉건시대에 영주들의 권력은 막강했다. 왕권은 영주들의 입김에 나날이 흔들렸지. 쟁쟁한 가문을 제치고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신데렐라를 과연 영주들은 납득할 수 있었을까?
사랑에 눈이 먼 왕자는 논외로 두겠다. 대의를 짊어져야 할 차기 왕이 고작 여자 하나에 휘둘린다며 서민들에겐 지탄의 대상이 되었으나 상관없었다. 하지만 반란의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던 이들에겐 아주 좋은 명분이 되곤 했다.
왕조차 아들의 혼인을 반대했다. 왕자는 하루빨리 왕권을 회복해 신데렐라와 함께하고 싶었다. 정사를 돌보기 바쁜 왕자를 대신해 신데렐라는 버려졌다. 갇힌 방에서 하루 종일 그를 기다리는 신데렐라에겐 화려한 집이나 값비싼 보석, 고운 드레스 따위는 필요가 없었다. 왕자의 사랑이면 충분했다.
바쁜 왕자는 점점 신데렐라에게로 걸음 하지 않고, 그녀는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왕자가 정말 사랑한 게 내가 맞았을까? 불안은 의심을 낳고, 의심은 다시 불안을 재생시켰다. 왕자의 마음이 조금만 식어도 난 내쳐질 것이다. 나는 이제 돌아갈 곳도 없는데. 계모와 새언니는 절대 나를 받아주지 않을 텐데. 빛도 들지 않는 궁전의 아주 깊숙한 방에 웅크려 앉은 신데렐라는 오늘도 오지 않을 왕자를 기다린다.
여기서 다시 질문을 던지겠다. 그런 신데렐라는 정말 행복했을까?
정말 행복했을까.
* * *
석진과 여주는 각자의 시간을 빽빽하게 보냈다. 빠지지 않고 새벽에 오피스텔을 들렀으나 여주는 대부분 잠들어 있었다. 여주가 깨는 날이면 입을 맞추고 함께 밤을 보냈다.
시험은 끝나고 금세 11월이 도래했다. 그리고 여주는 역대 최하의 점수를 받았다. 삶의 간절함을 숫자로 등급 짓던 여주는 무너졌다. 간절하고 절박한 것들이 도려졌다.
이젠 가을이라 부를 수 없는 대기가 차가웠다. 최저 기운은 겨울 수준으로 하락했다. 이르게 꺼낸 돕바는 며칠 내내 제 몫을 톡톡히 했다. 여주가 핸드폰을 통해 기온을 확인하며 인문대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윤기의 강연이 있는 날이었다.
"밤이다, 아, 내가 빛이어야 하다니. 그리고 밤과 같은 것에 대한 갈증이여. 그리고 외로움이여.
밤이다, 이제 나의 열망이 내게서 샘물처럼 솟구쳐 오른다. 말을 하고자 하는 열망이.
밤이다. 이제 솟아오르는 샘들은 더욱 소리 높여 이야기한다. 나의 영혼 또한 솟아오르는 샘이다.
밤이다. 이제야 비로소 사랑하는 자들의 노래가 모두 잠에서 깨어난다. 나의 영혼 또한 사랑하는 자의 노래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노래했다."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밤의 노래>
눈을 감은 채 윤기가 읊는 시구를 들으면 생각이 잠시나마 단정해지는 기분이었다. 윤기는 일상과 시, 그리고 사람에 대해 이야기했다. 윤기 특유의 나른한 시선에 적셔져 있으면, 한가로운 길거리에 배를 까뒤집고 낮잠을 청하는 고양이처럼 잠시 세상의 것들이 멀게 느껴졌다. 따스한 오후 햇살을 내어주곤 했던 시집이었다. 오늘 민 선생님을 볼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오늘 강연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그럼 질문 있을까요?"
말이 끝나자마자 여주가 손을 들었다. 윤기가 여주에게로 몸을 틀었다.
"안녕하세요. 바이오 재학 중인 한여주라고 합니다. 오늘 강연 잘 들었습니다. 특히 인용해 주신 니체의 <밤의 노래>가 인상 깊었어요. 민 선생님의 시처럼 달콤하고도 씁쓸한 느낌이었습니다. 민 선생님의 시는 캔디로 포장한 공진단 같은 느낌이에요. 그러한 시 안에 민 선생님이 투영하고 있는 삶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시는 절대 100을 말하지 않습니다. 1을 써도 99를 써도 시라 부르지만, 100을 말하는 순간 시로서 정체성을 잃게 되죠. 읽는 사람이 채워야 할 공백이 존재합니다. 저는 인생의 거대한 가치보다는 그날의 공기나 바람을 숫자 1만큼만 시에 담습니다. 달콤씁쓸함을 느끼셨다면 그 비밀은 제가 비워둔 99에 있었던 게 아닌가 싶네요."
강연이 끝나고 윤기는 미학과 원로한 교수의 연구실에서 담소를 나눴다. 10년가량이 지났는데도 제자는 기억에서 또렷했다. 재학 중 등단했던 윤기는 교수들의 독보적인 관심을 받았다. 몇 마디 안부를 끝으로 윤기가 인문관을 나섰다.
가을도 겨울도 아닌 캠퍼스는 어딘가 오묘했다. 모교는 어렴풋한 기억 너머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변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새순이 돋고 꽃이 피면 다시 지는 것처럼. 윤기에게 시는 그런 것이었다. 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노래하고 싶었다.
호숫가 앞에서 여주를 만났다. 물안개가 차가웠다. 벤치에 앉아 핸드폰을 물끄러미 보는 여주는 어딘가 멈춰 있었다. 그런 여주가 호수의 물안개 같았다. 여주가 고여 있는 것 같았다.
"뭐해요?"
"……민 선생님? 안녕하세요."
옆으로 앉는 윤기를 두고 애써 웃었다. 입을 달싹이던 여주가 끝내 다물었다. 말을 하기 싫다면 굳이 물을 생각은 없었다. 윤기가 다리를 꼰 채 호수를 가만히 보았다.
"…민 쌤."
"네."
"지민이는 아직 편의점 와요?"
"자주."
"삐쳤겠다."
"미안해하고 있던데."
"저한테요?"
"고맙다고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간 것 같대요."
"아…"
"놀러 와요. 바쁘면 전화라도 해보고."
"…네. 그럴게요."
그렇게 두고 온 지민도 여러모로 걱정이었다. 여주의 말이 흐릿했다. 고작 몇 주 남짓인데 여주의 대화 방식이 전과 달라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여주 양. 네. 윤기가 호수를 건너 보며 말했다.
"왜 전공을 바이오로 선택했어요? 철학이나 다른 인문학도 잘 맞을 것 같은데."
"돈을 벌고 싶었어요. 취업이 잘 되는 과가 1순위였거든요."
"고생이네."
"……."
"애썼어요."
윤기는 위로나 동정의 말은 건네지 않았다. 그게 전부라 여주의 마음을 움직였다. 구체적인 말을 해주지 않는 윤기가 좋았다. 빤히 보고 있던 시선은 윤기에게도 닿았다. 결국 참지 못한 윤기가 반대로 고개를 돌렸다.
"…왜 그렇게 봐요."
"눈 정화요. 민 쌤보면 마음에 안정이 와요."
"고맙네."
"김석진 교수님이랑 아는 사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두 분은 왕래가 없으시네요. 서로 이야기 나누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그 정도의 사이가 아니었나 보죠."
"교수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학교 다닐 때."
"나보다 여주 양이 더 잘 알 것 같은데."
"더 어려워요. 사실 잘 모르겠어요."
물 냄새가 짙었다. 흐르지 않는 호수는 어딘가 위태로웠다. 달려가는데도 왜 멀어지는 것 같을까. 교수님. 이 불안함은 정말 교수님 하나면 다 괜찮아지는 걸까요? 당신을 이렇게 사랑하는데 왜 저는 점점 약해지는 걸까요.
"글쎄요. 사람을 이렇다고 정의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제가 알았던 그 친구는 이미 10년도 더 됐고, 그게 그 친구의 전부는 아닐 테니 뭐라 말하긴 어렵고."
"…그렇죠. 제가 괜한 걸 물었어요. 죄송해요."
"뭐가 걱정인데요?"
"그냥…… 자신이 없어요."
"어떤 게?"
"제가 누군가한테 사랑받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윤기는 한동안 대답을 말았다. 해가 낙하하는 빛깔이 여주의 등 뒤로 가득했다. 그런 여주가 가여웠다.
"글쎄요. 대답은 내가 아니라 여주 양의 99에 있겠죠."
"……."
"남은 대답, 꼭 찾길 바랄게요."
윤기가 떠난 호숫가에 여주 홀로 남았다. 갈 길이 바쁜 사람마저 뜸해진 교정은 빠르게 밤을 맞이했다. 검은 바람 틈새로 무릎을 감싸 고개를 묻었다. 오피스텔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언제 올지 모르는 석진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시간은 싫었다. 석진은 자신의 품 속에서 고립되어 가는 그녀의 마음을 알았을까. 한참 숨을 죽이고 있을 때 인기척이 느껴졌다. 여주가 팔짱을 풀고 고개를 돌렸다.
가을, 그리고 봄. 언젠가는 계절 그 자체.
때로는 만남이고 이별, 아니 그 모든 단어의 사람.
99의 답 그것.
"여주야."
"……."
"나 왔어."
호숫가의 바람이 눅눅했다. 여주의 긴 머리가 흩날렸다. 야윈 얼굴의 호석이 여주를 향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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